2007년 12월 13일
제드 러벤펠드 - 살인의 해석
살인의 해석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나의 점수 : ★
-결국 이번 기회에 다 봤습니다. 근래 반년 안에 본 것 중에 이 정도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 준 것이라면 [1408]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언제나 영화보다 책 쪽에 점수를 더 잘 준다는 걸 고려하면 이것은 정말로 독보적인 결과입니다. 심지어 [다 빈치 코드]도 이 책보다는 재미있습니다.
원래 책 앞뒤에 씌어 있는 말에 대해서는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왜냐면 이 책의 홍보 포인트가 정말로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앞표지 타이틀 아래에는 "정신분석학과 추리소설의 완벽한 만남! 프로이트와 융, 미국의 연쇄살인을 해석하다! " 라고 씌어 있는데 이 말은 과장이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전립선 문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융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다른 제자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뻔하디 뻔한 말을 충고랍시고 던지고 그러다가 좀 쓰러지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안 합니다. 카를 융은 미국에 도착한 당일부터 매우 이상하게 행동하고 비밀스럽게 모습을 감추고 더욱 이상하게 행동하고 수상쩍은 자들과 접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일도 안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같지도 않아.

그 유명한 사진.
모든 추리는 작가의 페르소나임이 분명한 상류 계급 출신의 젊고 늘씬하고 잘생긴 정신분석의가 하는데 이 놈은 자기 직업윤리의 희박함을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때우려고 하고 프로이트는 그걸 부추깁니다. 물론 그러면서 환자들과 붙어먹는 카를 융을 비난하지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자 프로이트와 악마의 자식 융'의 구도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저는 프로이트도 싫어할 뿐더러 융이 정확히 무슨 파시스트적인 이론을 나불거렸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이 세상에는 일단 '카를 융 싫어하는 소설가들의 모임'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고 그 사실에 대해서만은 융에게 하염없이 동정심을 느낍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 두 사람이 별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미국 방문시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첫 페이지의 문구는 어떻게 해석해도 낚시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충격을 받을 만한 것은 대략 이런 것들이 있는데 1) 융의 변절 : 이것은 '미국인들' 을 야만인이라고 일컬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2) 살인사건 자체 : 사건의 잔혹성으로 그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이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이런 류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지극히 온건합니다. 제가 21세기의 때에 찌들었나 싶어 일부러 [연쇄살인범 파일] 따위를 다시 읽었습니다만 20세기 초반이라고 해서 이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사건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3) 살인사건에 드러난 미국인들의 변태심리 : 이 사건의 내용물은 앞에 언급한 '귀족가문출신의젊고늘씬하고잘생긴정신분석의™'의 분석에 따르자면 그야말로 프로이트 이론에 입각한 모범적인 케이스이니 여기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 그야말로 자기 목을 조이는 결과가 되지요.
이쯤 되면 실은 프로이트 지능안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프로이트가 과연 지능안티가 필요한 정도의 인물인지는 논외로 하고요. 하지만 작가의 경력이나 홍보방향으로 보아 그럴 리는 없으므로 이건 그냥 '한번 망상해 본 걸 두번 생각지도 않고 실행에 옮긴 소설' 이라고 보는 게 적합할 겁니다. 모 님이 종종 '영화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고...' 라는 탄식을 하시는데 소설은 혼자 쓰는 거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 계획된 베스트셀러라면 편집자가 옆에서 이것저것 잡아줘야 했을 텐데 그것조차도 안 한 것 같습니다. 넘쳐흐르는 아마추어리즘에 익사할 거 같아요!
역시 홍보 포인트 중 하나인 '20세기 초 뉴욕의 풍부한 풍속 묘사' 같은 것도 없습니다. 이 말 한 사람은 '풍속'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고, 작가는 그 시대 여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읽다가 질려서 토할 것 같은 분량의 '당시의 뉴욕 건물들'의 묘사인데 그야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겠지만 최소한 저는 아닙니다. 여자에 대해서나 범죄에 대해서나 자료 하나 들쳐보지도 않은 채로 흠'ㅁ' 하고 생각한 걸 그냥 옮긴 것 같아요. 빅토리아 시대 영국 도색잡지에서도 비웃음당할 것 같은 중학생 수준의 에로 망상을 펼쳐놓고 '오오 사악한 변태의 섹스살인 오오' 하고 있는데 정말 견딜 수 없습니다.

영국판 표지. 이게 제일 낫군요.
내용보다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정말 너무나도 저렴해 보이는 표지 사진이었습니다. 한국판 디자인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책 자체의 모양새는 고급스럽고 공을 들인 티가 났지만 저 사진은 정말...=_=; 그나마 (같은 사진을 쓰고 있는) 미국판 하드커버는 더스트재킷을 이중으로 써서 사진을 좀 가렸다고 들었습니다. 참고로 한국판 앞표지에는 "뉴욕타임즈,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전세계 32개국 출간 예정! 영화화 결정! " 이라는 말이 씌어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의 아마존 사용자 평점은 51명 평균 별 셋 반으로, 아리아나 프랭클린의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Mistress of the Art of Death](41명, 별 넷 반)보다 뒤지며 심지어 다이언 셰터필드의 [열세 번째 이야기The Thirteenth Tale: A Novel](407명, 별 넷)보다 처진다는 것을 괜히 밝혀두고 싶군요.

미국판 하드커버의 이중 표지.
저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컨셉인 듯.
저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컨셉인 듯.
전반적으로 내용물보다는 한국판 책의 모양새 쪽이 더 훌륭합니다. 요즘 추리소설 페이퍼백들을 문고판이 아니라도 가볍게 내려는 시도가 있는데(매우 마음에 듭니다) 이 책은 500페이지가 넘고 장정에 꽤 공을 들인 고로 그 정도까지 가볍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기분 좋은 무게입니다. 최소한 어느 출판사의 책들처럼 팔이 빠질 듯한 고통을 안겨주지는 않습니다. 미국판 페이퍼백의 표지 사진을 내지 중 한 군데에 실은 것도 재미있습니다. 다만 디자인 정보가 빠져 있는 게 좀 아쉽네요. 아, 음식과 관련된 한두 가지 오류와, '얇은 허리' 같은 거슬리는 표현을 제외하면 번역은 괜찮았습니다.
# by | 2007/12/13 09:25 | Dear Detective! (추리) | 트랙백 | 핑백(1)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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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이르는 병]을 읽고서는 혀를 찼지만 그래도 그 속도감에 별 셋을 주었으나...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괘씸하여 별 둘로 깎았습니다. 별 하나가 아닌 것은 최소한 [살인의 해석] 만큼 무식하게 길지 않은 탓입니다. 그러니까 [미륵의 손바닥]의 별은 안전하게 처음부터 둘로 하겠습니다. 감상이 '야임마' 인 책에 별 둘을 주느냐...그것은 ... more
이오냥 / 저어, 저도 [열세 번째 이야기] 에 별 넷을 주었습니다만...^_^;
물론 저기 별점을 준 많은 아마존 사용자들과는 감상의 포인트가 좀 다를 거라고는 생각해요. :]
정해민 / 오히려 불타시지 않을까도 생각했습니다. (...)
TITANESS / 그런 책이 어디 있냐고요? 있습니다. ( -_-)
와이티 / 저는 주위 언중의 단어 사용을 지켜보면서, 조만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_-; 지금까지 약 15년째 괴로워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예요.
와이티님꼐서도 역시 한번쯤 보시는 것도...제가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
L_Psyfer / 저는 그 넥타이핀 타령 때문에 진심으로 좀 울었습니다. 진짜예요.
꼼꼼한 분노의 포스팅에 추천을 마구 날려드립니다 >ㅅ<~
거의 십 년 전에 본 '유리로 만들어진 세상' (역시 무지 재미없었던 이상한 소설) 에도 꽤 칠칠치 못한 치료자로 묘사하던데, 지금도 그렇지만 이건 프로이트의 시대에도 상당히 문제가 된 행동입니다. 이 시대에 치료자들이 내담자와의 전이를 애정으로 오해해서 정분이 난 일이 꽤 많아, 당황한 프로이트가 주의하라고 글도 쓰고 그랬다네요.
융이 그 정도로 소양이 부족한 심리학자는 아니라고 봐요. 다소 신비주의적으로 세간에 인식된 탓(마법사로 소문난 적도 있다는;;;;) 에 여러가지 소문과 루머가 상당히 많았다고는 하는데, (특히 반기독교적이라는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도 지나가듯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저 정도의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건지.
근데,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앉은 수염할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하긴 하네요. 저 사진을 어디선가 보긴 본 거 같은데.
이분입니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이죠. 사진은 1909년의 첫 방문 때 클라크 대학에서 강연하고 메인홀 앞에서 찍은 것입니다.
유태계 작가들중에 융까-_-가 종종 있는 건 융의 집단적 무의식 이론에 대해 나찌스 일부가 보인 호감 때문이겠죠. 크롤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팬덤이 무서워서(...) 그냥 놓아두지만 융은 걔네들 입장에서는 이교도에 외국인이라;
Armand / 모 님이 이 책의 하이프에 대해 "뭔가 잘 읽힌다든지 하는 장점이라도 있어요? 아니면 시체 수로 밀어붙인다든지? " 라는 질문을 하셨었는데, 그에 대한 제 대답 : "아버지와의 대화를 발췌하자면 이래요. '이 책 되게 못 썼더라고요.' '그러게, 진도가 안 나가'. 그리고 500페이지 내내 시체는 한 구. "
...여전히 분노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
쇠붕 / 이 소설에서 진짜로 칠칠치 못한 것이 열렬한 프로이트학파인 주인공이라는 걸 생각하면 작가는 글쎄...모 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지금 세상에 프로이트 얘기를 하려면 대단히 신선하거나 대단히 뻔뻔하거나 둘 중 하나는 갖춰야 할 텐데, 라고요. 500페이지짜리 잘 못 쓴 팬픽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_-;
y.. / 막 찾아서 답변하려는데 대신 써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ㅁ^
delius / 영화가 개봉되면 또 압력에 시달리시지 않을까요? ^^;
euphemia/ 프로이트는 많이 오해받은 사람 중에 단연 톱이라 불리워도 좋을 이론가란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를 인식하는 수준은.. 제 생각이지만 바로 이 오해의 절정같아요. 근데 그게 저 책 나온 나라도 별반 다른거 같진 않네요. 시대를 앞서간 사람으로서의 프로이트는 상당히 흥미진진한데 저런 선정적인 소설만 나오니 나름 이부분도 애석하긴 융과 비슷해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