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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E] 스코트 오델Scott O'dell -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 / 검은 진주

-존 로 타운젠드의 [어린이책의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만(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길게 포스팅하겠습니다), 20세기를 다룬 후반부 분량을 보고 있자니 새삼 ABE 전집의 셀렉션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타운센드가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라고 꼽은 작품들 중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타운센드가 다루지 못한 비영어권 국가의 작품들까지도 커버하고 있으니까요.

이번에야말로 어린 시절의 3대 트라우마작을 다 읽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ABE 전집에서 트라우마작의 개수를 센다면 17트라우마니 32트라우마니 하는 숫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절대 한 자리 수로 끝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일단, 저 책에서 언급해서 생각난 김에 스코트 오델의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The Hawk That Dare Not Hunt by Day] 를 다시 읽고, 이게 대체 정확히 무슨 이야기였는가를 파악해 보기로 했습니다.

읽었다면서 무슨 소리냐...읽었다고는 해도, euphemia 만 9세, 라틴어 성경의 영문 번역이 어떤 종류의 위협이 되는지를 정확히 깨달았을 턱이 없습니다. '혁명' 이라고까지 불리는 데는 글쎄...그러니까, 간단한 이야기예요. 헨리 8세가 왕이던 시절, 인쇄술의 힘을 입어 처음으로 영역 성서를 대량 배포하려 했던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저 성의 발음은 '틴들' 이 맞습니다) 후대에 끼친 그의 영향은 상당합니다. 흠정역 성서King James Version도 틴들의 번역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본인은 이단과 반역이라는 좀 알쏭달쏭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했습니다.
William Tyndale (1494-1536)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에서는 틴들 목사의 인생 후반, 성서를 번역하고 밀수(유럽에서 찍어서 영국으로 들여오기 위해) 하던 때에 초점을 맞추고, 성서 밀수를 돕는 소년 톰 바튼Tom Barton의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튼 소년은 어릴 때부터 삼촌 잭을 따라 항해를 다닌 터라, 기묘하게 세상 물정에 밝습니다-틴들 목사보다 더. 그러나 그 역시 영역 성서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상황을 잘 깨닫지 못하면서도 이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의 중심이 어쨌든 윌리엄 틴들이라는 '좋은 사람', 진정한 크리스트교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실제로 틴들이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21세기적 관점으로 바라보기에도 그가 한 일이 별로 나쁘지 않은-일부 특권계층을 제외한 사람에게는 심지어 좋은-것임은 확실합니다. 이 '좋은 사람' 에게 세상이 무슨 짓을 했는가와, 그 사실에 대한 바튼 소년의 반응이 이 소설의 핵심인데, 소년은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다가 마지막에 갑작스레 틴들 목사의 마음을 깨닫고 '어른이 됩니다'-즉, 원수라고 생각했던 틴들의 밀고자를 용서하게 됩니다. 아니, 실은 저 같은 좁은 사람으로써는 '어른이 되다' 정도로도 부족하고 인격자가 되었다고 해야 할 정도의 변화입니다만...윌리엄 틴들 목사가 사라져 간 세상에서 그가 행했을 법한 일을 대신 행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소년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 준다고 해야겠지요. 소년에게는 이제 삼촌도 없고 틴들 목사도 없으니, 그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책들이 많은 ABE 전집에서도,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의 어두운 터치는 각별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문학의 힘이란 굉장합니다. 극동의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이 살아온 소녀에게도 신교도 혹은 구교도에게 쫓겨 피신하는 힘든 여행길의 꿈-그러니까 악몽-을 꾸게 합니다!) 원래 아이에게 친절할 의도가 없이 씌어진 책들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ABE 전집의 책들인데, 그 책의 작가들 중에서도 스코트 오델은 각별히 '너 사실 애 싫어하지' 라는 혐의를 받을 것만 같습니다. :]

[검은 진주The Black Pearl]는 오델의 그런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애...라기보다 소년을 싫어한다고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젊은 혈기라고 일이 다 잘 되는 건 아니지' 라는 우울함이 여기도 서려 있습니다. (리스트에서 이 책을 찾지 못하시는 분들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말씀드리자면 이 작품은 아이반 사우스올Ivan Southall의 [여우굴The Fox Hole]뒤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미친 듯이 꼬이고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이 1인칭의 소년들은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어조는, 어쨌든 이 세상은 젊은애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체념한 꼰대의 목소리입니다.

[검은 진주]의 세계는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보다 한결 우화적이며, '소년이 바다의 군주로부터 훔친 진주가 불행을 불러온다'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동화 그 자체입니다.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좀 더 철학적인 이야기일지라도요. 어쩌면 진주를 바치지 않았어도 폭풍은 일지 않았을 지 모릅니다. 어쩌면 진주를 그대로 손에 쥐고 있었더라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자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스스로 테두리를 치는 법을 깨닫게 되는 순간 소년은 어른이 됩니다.

실은 저는 아직 작가의 가장 대표적이라고들 하는 [푸른 돌고래섬Island of the Blue Dolphins]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코트 오델에 대한 이런 속단이 과연 올바른지 다소 염려가 되기도 하는군요. 언제고 읽을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제게 ABE전집의 뒤쪽 44권이 없는 고로, [무인도 소녀([푸른 돌고래섬]의 ABE 전집판 제목)]에 대한 리뷰를 쓰지는 못하겠습니다. 다음 번에는 아이반 사우스올의 [여우굴]을 가볍게 언급하며, 같은 작가의 [산골마을 힐즈엔드Hills End]와 헨리 빈터펠트Henry Winterfeld의 [아이들만의 도시Timpetill - Die Stadt ohne Eltern]를 나란히 리뷰하도록 하지요. :]

Trivia
[검은 진주]는 1999년 [라몬의 바다] 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알라딘 도서 정보를 믿는다면 아직 절판이 아닌 것 같네요.
라몬의 바다
스콧 오델 지음, 김옥수 옮김, 민애수 그림 / 우리교육

by euphemia | 2007/12/10 11:28 | MidnightFeast (어린이책)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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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rmand at 2007/12/10 15:22
....그럼 설마 44권 전반은 모두 소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부럽습니다. 이 전집, 외국의 도서전집을 그냥 번역한 것은 아니고 출판자가 해외 유학파 학자들의 추천을 받아 하나하나 취사선택해 번역한 거였다고 합니다. 센스도 좋아. -_-;;
Commented by Luxferre at 2007/12/10 18:12
블랙펄과 푸른 돌고래섬 둘 다 (여러가지 의미로) 굉장하지요. 특히 푸른 돌고래섬은 절대 잊을 수 없으리만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또 다시 읽고 싶어질만큼 중독성에 가까운 매력이 있던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어요.
Commented by soulfood at 2007/12/10 21:10
무인도 소녀! 오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 엄마는 이걸 왜 남 주셨을까 orz
Commented by ZinaSch at 2007/12/10 21:25
저도 전집의 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책들은 기억에 없는 걸 보니 빠져있었던 모양이네요;; ABE의 책들은 확실히 양질이었습니다. 같은 동서에서 나온 추리소설 전집도 꽤 좋았던 기억이...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7/12/10 23:30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별로 애들에게 마음놓고 권할 만한 내용은 몇권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OTL
(즐거운 얘기보단 가슴아픈 얘기가 너무 많아서...T.T)
이사 관계로 동호회 분에게 헐값에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아쉽군요.
Commented by 루시엔 at 2007/12/10 23:56
"에이브의 우울" 최고봉은 역시 "엄마는 마녀가 아니에요"와 아 그리고...
지금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단편 시작한 후 바로 3페이지 내에서 열명쯤 되는 가족들이
차례차례로 몰살-_-당한 작품이 기억납니다.
Commented by 지원 at 2007/12/11 05:43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 무심코 읽던 계몽사의 "빨간 책" 전집에도 우울한 내용이 참 많았던 것 같아요. 요즘 들어 그림동화의 원작이 잔인하다 어쩌다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계몽사 책에서 읽었던 "불에 달군 쇠구두를 신겨 계모를 죽이는" 장면은 정말 충격과 공포였지요-_-;
Commented by euphemia at 2007/12/11 10:31
Armand / 네, 본가에 지고 있는 큰 빚이죠. ( -_-) 치우라고 몇 년째 협박받고 있는데...
...신나서 자기 유학시절 트라우마작을 소개해주는 해외 유학자 학파들의 빛나는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Luxferre / 헉, [푸른 돌고래섬]이 그렇게 굉장하단 말입니까! 한번 구해볼까나...

soulfood / 다들...;ㅁ;

ZinaSch / 전 뒷부분 44권이 좀 궁금하기는 해요. 실은 갖고 있는 분량에도 과도하게 만족하고 있지만...

잠본이 / 원서나 영역본으로 전부 갖추기 전까지는 안 판다고 집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ㅅ-
존 로 타운젠드도 어째 자기가 읽기에 신나는 것들 위주로 추천하고 있는 것 같아요. (...)

루시엔 / 아네르슨의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Heksefeber마녀열)]는 여러 사람에게 트라우마 거리였지만 저는 저 부분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비교적 초연했습니다. 원인이라면 역시 새벗문고가 아닐까...
말씀하신 단편은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뒤에 실려 있던 존 도노반John Donovan의 [산 속의 외돌토리Wild in the World]일 겁니다. 네, 저는 확실히 이쪽의 어둠이 더 인상적...

지원 / 계몽사 동화 쪽은 '중세적 상상', 에이브 쪽은 '현실의 쓴맛' 이랄까요. T^T 기회주의와 배신과 하여튼 진창 그 자체...
Commented by viai at 2007/12/12 21:38
훌륭한 작업 시작하셨군요(...)'암흑의 전집 에이브 시리즈에 상처받은 영혼을 토로하는 자리'라면 저도 빠질 수 없습니다! 숲속의 외돌토리 서두의 대량학살은 그 후 13년이 지난 이후에도 감히 따라갈 책이 없었답니다.
Commented by euphemia at 2007/12/13 17:44
응원 감사합니다. (...) 앞으로 몇 권이나 더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한다면 역시 꿀꿀한 것들부터 하게 되겠지요. 초원의 집 같은 책들이야 새삼 지금 안 해도...( -_-)
Commented by 아카리 at 2007/12/16 04:23
지금 생각하면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와 '무인도 소녀'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니 어째 무섭습니다;ㅁ; 왜인지는...에이브 88권중에서 저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였던 작품은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외에 '목화마을 소녀와 병사'가...두번 다시 꺼내서 읽어보기도 싫을 만큼 오싹했습니다;;; '샘 아저씨 유산' 같은 건 솔직히 지금 읽어도 잘 모르겠습니다ㅇ>-<
Commented by euphemia at 2007/12/16 09:55
[목화마을 소녀와 병사] ...그게 있었지 참. -_-; 그 아버지 진짜 제대로 끝내주는 짐승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오싹해요. 이 얘기 요즘 한국에 번역해서 내놓으면 먹힐 텐데. 다음 포스트는 이걸로 할까요? 세트가 될 만 한 거 하나 골라봐야겠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역시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가 될 것 같기도 하네요. :]
Commented by violetise at 2007/12/18 04:33
앗, 밸리에서 글 보고 왔습니다. 에이브 정리하시는군요. 위의 분들이 적으신 책들 중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것들이 많아서 초면에 답글 남깁니다. 전 전집 엄마가 다른 사람 주셨거든요. 울며 안 돼요, 외쳤는데, 결국 그리 되었어요. ㅠ_ㅠ
목화마을 소녀와 병사, 너무 좋아하고 또 슬퍼했어요. 엄마는 마녀가 아니에요,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일곱 개구쟁이던가, 그것도. 그리고 샘 아저씨의 유산, 먼 황금나라 이런 책도 좋아했구요. 위의 답글 보면서 맞다, 이것도 있었지 떠오르는데요. 와.. ^^
링크 신고할게요. 지금 미국에 있는데 적어주시는 책들 중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은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반갑고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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